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족대표 33인 (문단 편집) == 상세 ==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한규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477|윤용구]][* 나무위키 문서 [[윤용구]]에 적혀있는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박영효]], [[윤치호]][* 이때 윤치호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한 것도 아니었다. 윤치호가 적극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한 것]]은 [[1940년]]경이다.], [[이완용]]과도 접촉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민족대표를 꾸리게 되었다. 이 때 [[가톨릭]]과 [[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두 명만이 참가했다. 반면 개신교는 개신교 내의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올라있던 상황이라 천도교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단이 결성되었다. 원래는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으로 30인을 구성하려 했으나 개신교 종파인 [[감리회]]와 [[장로회]]가 숫자를 놓고 다투다가 각각 8명을 내세우고 16명으로 개신교 대표를 늘리는 대신, 불교 2인도 포함시키면서 현재의 33인으로 구성되었다. 의외로 민족종교인 [[대종교]] 인사들은 여기에 관계하지 않았다. 당시 대종교 교단은 분리되어서 반일세력은 만주로 거점을 옮겼고 당시 국내에 남아있던 단군교는 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유교는 학파별로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이 심했는데 호남의 거물 유림인 간재 [[전우(학자)|전우]]는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거부했지만,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들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참가를 결정했다. 결국 영남 지역 등 일부 학파에서 [[김창숙]]을 비롯해서 유림대표 2인을 파견했는데, 모친의 와병으로 인해 사정이 생겨서 늦게 도착하여 서명할 기회를 놓쳤다.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들의 이름이 없는 것을 안 유림 대표들은 막대한 죄를 지었다며 길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세도정치|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갖 죄악은 다 지어놓고]][* 굳이 말하자면 이들이 직접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립, 집행하여 나라를 망치거나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책임은 없지만, 유교적 논리에 따르면 이런 시기에야말로 유림들이 필요한 때로 유림들이 이를 바로잡아줘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림들은 세도가들에게 제대로 맞서지 않았고, 그러한 점에서 책임이 컸다는 의미다.] 오늘날 민족적 독립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아니하였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면박을 주자,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김창숙 등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이 수치를 씻자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3.1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진 유림 세력의 최후의 함성이 면우 곽종석을 중심으로 시작된 1919년의 파리 장서 사건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국내 유림의 편지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간재 전우를 비롯해서 외적을 데려와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나 머리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이나 유림으로서 할짓이 못된다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참여한 유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곽종석 등 여러 유림들이 투옥되었다가 순국했다. 유림 세력들이 천한 상놈들의 모임이라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용운이 변절 또는 한용운을 제외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거나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운동이 항일운동의 전부라는 주장도 있는데, 근거없는 루머에 불과하다. 확실하게 식민지 체제에 협력한 사람은 박희도, 정춘수, 최린의 3명(최남선을 포함하면 4명)밖에 안 되며 나머지 대표들은 3.1 운동 직후 또는 이후로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살아남았더라도 일제를 피해 중국과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http://premium.mk.co.kr/view.php?cc=110002&no=15381|"3·1운동 이끈 민족대표 대부분 변절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